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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KIM HYOUNG SUL


2022
SEOUL, KR
Kim Hyoung Sul Solo Exhibition

Exhibition
























Kim Hyoung Sul
Solo Exhibition
METAPHOR 32
32, Pyeongchang 7 gil, Jongno gu, SEOUL, KR


<사라지며, 찾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이다. 어떤 형태를 빌려 그것을 닮아가는 행위를 하다 보면 – 그 작업은 대개 반복적이다 -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상념이 나를 덮쳐온다. 몸서리를 치다 보면 갑자기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시점이 온다”

-작가 노트 중에서

김형술은 밀려오고 깨지며 흔들리는 순간에 놓여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히 콘크리트를 붓고, 표면을 긁고, 깎아내며 고요히 가라앉는 시간을 기다린다. 사라지고 나서야 발견하는 것이 있다. 내려 놓는 순간 생겨나는 것처럼, 그의 작업에서 색이 사라진 순간 다른 색을 찾았다. 김형술의 작업 '지형도(Topo-scape)'는 모든 색을 흡수해 토해낸 듯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밀려오고 흔들리고 깨지는 자연의 어떠한 순간과 선연한 색을 연상시킨다. 작업의 주재료인 콘크리트 역시 자연의 척점에 서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생동하는 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요동치는 감정과 생각을 침잠 시키고, 그 위 말갛게 올라온 것들을 건져내 단단한 캔버스 위 올려 두듯 그려냈다.

작가의 행위는 간결한 개입으로만 존재하고 작가의 태도는 온전한 본능만으로 일관된다. 깨지고 부서지는 빙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깊게 밀려오는 바다는 그의 신작 지형도(Topo-scape)에서 주되게 보여지는 이미지로 마치 자연 속 격렬하게 생동하는 순간을 건져 올려 캔버스에 집어넣은 듯하다. 여기서 마치 색이 사라진 듯하지만 다시 되찾게 된다. 흑백의 콘크리트 회화는 시각적으로 충만한 색을 즉각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자연의 순간을 통해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강렬하고 분명한 시간과 온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희고 차가우며 서늘한 온도의 빙하, 건조하고 흐드러진 바람 속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갈대, 심해에서 끌어온 듯 검푸른 빛으로 덮어버리며 밀려오는 파도의 색이 뚜렷하게 공명한다. 작가는 색을 입히기보다 색을 사라지게 한 뒤 오로지 명암과 질감으로만 지형도의 색을 표현했다. 이와 같은 색의 증발은 그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순수한 본능만으로 이루어진 까닭인데, 작업을 매개로 자신을 반추하며 얽힌 감정과 기억을 자연의 섭리처럼 두기 때문이다. 작가는 순수를 원초적이면서도 결핍의 상태라 일컫는다. 응축된 내면에서 쏟아져 흐른 원색들은 결국 색을 잃은 흑(黑)색으로 토해져 나오듯, 생동하는 순간의 원초적인 자연은 순수한 흑백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그의 지형도 시리즈의 작업방식을 살펴보면 캔버스 위 콘크리트를 붓고 그 위 표면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에게 있어 반복적 행위는 자연으로 가는 구도의 길이다. 쉼없이 긋고, 긁어내고, 깎아낸다. 의식을 최소화하고 그저 반복적으로 행위를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외 불필요한 행위는 더하지 않는다. 하나의 행위만으로 농담을 조절한다. 자연의 반복 역시 그렇지 않은가. 매일, 매 계절과 매 해를 반복하며 형상을 갖추었다가 부수었다가, 다시 쌓아 올리고 조금씩 허물어 내리기를 반복하는. 그렇지만 자연은 늘 같은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작가도 자연이 지닌 격렬한 고요를 닮기 위해 무수한 담금질을 반복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행위는 간결한 개입으로만 존재하고 작가의 태도는 온전한 본능만으로 일관된다.

작업 전반을 걸쳐 그가 정의하는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퍽 흥미로운데, 이는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더 명확히 읽어낼 수 있다. 인공을 다듬어 자연을 만든다. 콘크리트와 아크릴이라는 철저한 인공물을 통해 자연을 구현하고자 하는 태도는 결국은 자연으로 회기하고자 하는 환원적 욕구에 기인하는 동시에 자기 극복의 의지인 것이다. 콘크리트를 주 재료로 하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작가의 이력이 역설적으로 그가 재료에 대해 갖고 있는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재료에 투영한 본인을 수없이 긋고 긁는 것은 자신의 층을 만들어내는 일로, 시간만이 줄 수 있는 고요한 안정을 자신에게 담아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마치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화, 적층과 같이 무수한 시간의 결과를 재료이자 작업, 혹은 자기 자신으로 바라보는 인공물에 담아 궁극적으로 닿고자 하는 극진한 가치를 스스로 생성해내는 것이다. 즉 인공은 작가의 재료이자 작가 자신이고, 자연은 하나의 인간이자 우주이자 작가가 닮고 싶어하는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계절이 끝나가면 겹쳐지듯 남은 계절의 잔상을 그리워하고, 잔상 위 포개지는 새로운 계절을 세차게 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역설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가지고 싶은 것을 인식한다. 작가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찾아낸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기에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자연은 순환할 뿐 영원하지 않고 완성하지 않으니까. 구도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명상적 태도를 천천히 불어넣고 작업 자체로 호흡하는 법을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강렬하게 원하고, 절절하게 증오했으며, 사무치듯 타올랐던 그 모든 감정과 기억이 섞이고 굳어졌다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던하게 일상을 임하며 다시 그들을 개어낸 후 반복적으로 층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시간의 적층은 곧 지형도가 되어 현재 작가의 위치이자 방향이 되고 동시에 과거의 지표가 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사라지고 찾아낸 어떤 흔적들을 보고자 한다. 미완의 과거이자 영원의 미래, 하지만 흔들리는 현재일 수밖에 없는 고요하고 무수한 흔적들을.



글 임지선